유소 (조위)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유소는 조위의 인물로, 건안 연간에 계리로 발탁되어 순욱의 휘하에서 일했다. 그는 일식에 대한 예언에 대한 회의에서 예기(禮記)의 선례를 들어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후 태자사인, 비서랑 등을 거쳐 상서랑, 산기시랑을 역임하며 오경을 정리하여 황람을 편찬했다. 진류 태수로 재임하며 백성을 교화하고, 기도위로 율령론을 완성했으며, 산기상시를 거쳐 요동의 공손연에 대한 토벌 논의에서 공손강의 공적을 들어 관대한 입장을 보였다. 그는 조도부, 허도부, 낙도부 등 부를 잘 지었고, 하후혜로부터 황제의 측근으로 추천받았다. 경초 연간에는 군관고과 72편과 설략 1편을 저술했으며, 정시 연간에는 학문 강론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 사후 광록훈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유림이 뒤를 이었다. 저서로는 황람, 율략론, 인물지 등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조위의 작가 - 조비
조비는 삼국시대 위나라의 초대 황제로, 조조 사후 위왕과 승상 자리를 이어받아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위나라를 건국하고 황제에 즉위하여 구품관인법을 시행하는 등 내정을 정비했으나 오나라 정벌에 실패하고 요절했으며,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문장경국 사상을 내세우기도 했다. - 조위의 작가 - 조식 (조위)
조식은 삼국시대 위나라의 시인이자 정치가로, 조조의 아들이며 조비와의 후계 다툼에서 밀려 정치적으로 불우했지만 뛰어난 문학적 재능으로 건안 문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평가받는다. - 한나라의 작가 - 조조
후한 말기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시인이었던 조조는 뛰어난 능력으로 위나라의 기반을 다졌으나, 잔혹한 행위와 권력욕으로 인해 후대 평가에서 논쟁적인 인물이다. - 한나라의 작가 - 사마천
사마천은 중국 전한 시대의 역사가, 천문학자, 역법가로서 중국 최초의 통사로 평가받는 『사기』를 저술하여 기전체를 확립하고 역사 서술과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으나, 이릉 변호 사건으로 궁형을 받는 고난을 겪었으며 태초력 제정에도 참여하는 등 천문학과 역법에도 업적을 남겼다. - 중국의 학자 - 황공망
황공망은 원나라 말기의 화가, 시인, 음악가로, 본래 육견이었으나 황씨 집안에 입양되어 이름을 바꾸고 도교에 귀의하여 방랑 생활을 하다 50세 이후 그림을 그리기 시작해 산수화에 뛰어났으며, 문인화의 이상을 구현하고 후대 화가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 중국의 학자 - 서간
서간은 후한 말기 건안칠자 중 한 명으로, 가난한 환경 속에서도 뛰어난 학문적 재능을 보였으며 조조를 섬기며 관직 생활을 하고 유학에 기반한 독자적인 사상을 담은 《중론》을 저술하여 당대 인물들에게 높은 평가를 받았다.
유소 (조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유소 |
원어 이름 | 劉劭 |
자 | 공재(孔才) |
출생지 | 한단, 허베이 성 |
사망 시기 | 240년대 (조방의 정시 연간) |
직업 | 관료, 시인 |
작위 | 관내후(關內侯) |
가족 | 아들: 유린 |
관직 경력 | |
직위 | 산기상시(散騎常侍) |
군사 직위 | 기도위(騎都尉) |
행정 직위 | 진류태수(陳留太守) |
임명 시기 (진류태수) | 조예 즉위 후 (226년 이후) |
저서 | |
주요 저서 | 인물지 |
2. 생애
유소는 후한 말부터 조위 초기에 걸쳐 활동한 인물이다.
건안(建安) 연간(196년 ~ 220년)에 계리(計吏)로 발탁되어 상서령(尙書令) 순욱(荀彧)의 휘하에 들어갔다. 태사령이 원단(元旦)에 일식이 일어날 것을 상주하자 조정에서는 회의 진행 여부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이때 유소는 《예기(禮記)》의 선례를 들어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순욱의 지지를 받았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치려(郗慮)에게 초빙되기도 하였으나, 치려가 면직되면서 발탁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태자사인(太子舍人) ·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되었다.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상서랑(尙書郞) · 산기시랑(散騎侍郞)이 되었고, 조예 즉위 후 진류태수(陳留太守)를 거쳐 기도위(騎都尉)로 전임되었다.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제수받았다. 경초(景初) 연간(237년 ~ 239년)에는 조예의 명을 받아 관리들의 근무 평가 기준을 정립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는 학문 연구 공적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고, 사망 후에는 광록훈(光祿勳)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유림(劉琳)이 뒤를 이었다.
2. 1. 후한 말기 ~ 위나라 초기
건안(建安) 연간(196년 ~ 220년)에 계리(計吏)로 발탁되었으며, 상서령(尙書令) 순욱(荀彧)의 휘하에 들어갔다. 태사령(太史令)이 원단(元旦)에 일식이 일어날 것을 상주하였고, 이에 조정에서는 회의를 예정대로 진행할 것인지에 대해 논의하였다. 유소는 《예기(禮記)》의 선례를 들어 회의를 진행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순욱은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어사대부(御史大夫) 치려(郗慮)에게 초빙되었으나, 치려가 면직되어 유소를 발탁하지 못하였다. 이후, 유소는 태자사인(太子舍人) · 비서랑(秘書郞)에 임명되었다.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상서랑(尙書郞) · 산기시랑(散騎侍郞)이 되었고, 《오경(五經)》을 정리하여 《황람(皇覽)》을 편찬하였다. 조예(曹叡)가 즉위한 후 진류태수(陳留太守)가 되었으며, 다시 기도위(騎都尉)로 전임되어 《율령론(律令論)》을 완성하였다.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제수받았다.
오나라 손권(孫權)이 요동의 공손연(公孫淵)에게 사자를 파견해 연왕(燕王) 작위를 제공하자, 조정에서는 공손연 토벌 여부로 회의를 열었다. 유소는 공손연의 아버지 공손강(公孫康)의 공적을 언급하면서 위나라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공손연은 손권의 사자를 처형하고 그 목을 위나라로 보냈다.
유소는 부(賦)를 짓는 데 능통하여, 《조도부(趙都賦)》를 짓자 조예가 이를 칭찬했다. 조예는 다른 부를 짓도록 했고, 유소는 조예가 궁을 새로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것을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허도부(許都賦)》와 《낙도부(洛都賦)》를 지었다.
손권이 군사를 일으켜 합비를 공격하자, 정동장군(征東將軍) 만총(滿寵)은 오군을 격파하기 위해 휴가중인 병사를 소집하면서 중앙에 군사 증원을 요청하였다. 유소는 조예에게 보병 5000명과 기병 3000명을 파견하여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한 뒤, 적의 양도(糧道)를 끊으면 오군이 철군할 것이라고 자문하였고, 오군은 퇴각하였다.
하후혜(夏候惠)가 황제의 측근으로 유소를 추천했다.
경초(景初) 연간(237년 ~ 239년)에 조예가 백관들의 근무평정(勤務評定)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염려하자, 유소는 조예의 조서를 받고 《군관고과(郡官考課)》 72편과 《설략(說略)》 1편을 편찬하여 상주하였다. 의례 제정과 음악을 이용하여 세시 풍속을 고치기 위해 《악론(樂論)》 14편을 완성하여 상주하려 하였으나, 조예는 붕어(崩御)하였다.
정시 연간(240년 ~ 249년)에 학문 연구 공적으로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고, 숨을 거둔 이후 광록훈(光祿勳)에 추증되었으며, 아들 유림(劉琳)이 뒤를 이었다.
2. 2. 조예 시대
황초 연간(220년 ~ 226년)에 유소는 상서랑(尙書郞) · 산기시랑(散騎侍郞)이 되었고, 《오경(五經)》을 정리하여 《황람(皇覽)》을 편찬하였다. 조예가 즉위한 후 진류태수(陳留太守)가 되었으며, 다시 기도위(騎都尉)로 전임되어 《율령론(律令論)》을 완성하였다. 이후, 산기상시(散騎常侍)를 제수받았다.오나라 손권(孫權)이 요동(遼東)의 공손연(公孫淵)에게 사자를 파견해 연왕(燕王)의 작위를 제공하자, 조정에서는 공손연 토벌 여부를 논의하였다. 유소는 공손강(公孫康)의 공적을 언급하면서 공손연이 위나라를 배신하지 않을 것이라 하였고, 공손연은 손권의 사자를 처형하고 그 목을 위나라로 보냈다.
유소는 부(賦)를 짓는 데 능통하여, 《조도부(趙都賦)》를 지어 조예의 칭찬을 받았다. 조예는 다른 부를 짓도록 했고, 유소는 궁을 새로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는 조예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허도부(許都賦)》와 《낙도부(洛都賦)》를 지었다.
그 뒤, 손권이 군사를 일으켜 합비(合肥)를 공격하자, 정동장군(征東將軍) 만총(滿寵)은 오군 격파를 위해 휴가중인 병사를 소집하면서 중앙에 군사 증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유소는 조예에게 우선 보병 5000명과 기병 3000명을 파견하여 병력이 많은 것처럼 위장한 뒤, 적의 양도(糧道)를 끊으면 오군이 철군할 것이라고 자문하였고, 오군은 퇴각하였다.
이후, 산기시랑(散騎侍郞) 하후혜(夏候惠)가 좋은 인재를 추천할 것을 명받자, 하후혜는 유소를 황제의 측근으로 추천했다.
경초(景初) 연간(237년 ~ 239년)에 조예가 백관들의 근무평정(勤務評定)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염려하자, 유소는 조예의 조서를 받고 《군관고과(郡官考課)》 72편을 완성하였으며, 《설략(說略)》 1편을 편찬하여 상주하였다. 또한 의례 제정과 음악을 이용하여 세시 풍속을 고치기 위해 《악론(樂論)》 14편을 완성하여 상주하려 하였으나, 조예는 붕어(崩御)하였다.
2. 3. 조방, 조모 시대
조예 시대에 진류 태수가 되었다. 임지에서는 백성의 교육과 감화에 힘썼고, 그 자세를 칭찬받았다. 그 후 중앙으로 돌아와 기도위로 임명되었고, 의랑과 함께 율을 제정하여, 『율략론(律略論)』도 저술했다. 산기상시로 승진했다.요동의 공손연이 오의 손권과 연합하여 연왕의 작위를 받으려 하자, 조정에서는 이에 대한 토벌론이 상정되었다. 유소는 공손강의 공적을 들어 관대하게 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얼마 후 공손연은 손권의 사자를 처형하고 그 목을 위나라로 보냈다.
유소는 부를 짓는 재능이 있었는데, 이전에 지은 『조도지부(趙都之賦)』는 조예에게 칭찬받을 정도였다. 조예는 유소에게 부를 짓도록 명했고, 유소는 이를 받아들여 『허도지부(許都之賦)』·『낙도지부(洛都之賦)』를 지었으나, 그 내용은 궁궐 조영에 몰두하는 조예의 정치를 비판하는 것이었다.
그 후, 손권이 합비를 공격했을 때, 정동장군 만총은 손권을 격퇴하기 위해 휴가 중인 병사에게도 소집을 걸면서, 중앙으로부터의 군대 증파를 요청했다. 유소는 조예에게 "만총 등의 사기는 높아서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니, 보병 5000명과 기병 3000명을 파견하여 위세를 과시하면서 진격하게 합시다. 또한, 도착한 기병을 대규모로 전개하여 병력을 과시하고, 아울러 적의 군량 수송로를 위협하면 손권은 철수할 것입니다."라고 자문했다. 그리고 손권은 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퇴각했다.
중앙에서 현인을 찾는 조칙이 내려지자, 산기시랑 하후혜는 황제의 측근으로 유소를 추천했다.
경초 연간에 백관에 대한 근무 평정이 정해지지 않은 것을 걱정한 조예의 칙명에 따라, 유소는 『도관고과(都官考課)』 72개 조를 작성하고, 『설략(説略)』 1편도 저술하여 상소했다. 불충분한 부분은 수정을 요구했다. 또한 의례를 제정하고 음악을 지어 풍속을 개혁하기 위해 『악론(楽論)』 14편을 작성했지만, 헌상하기 전에 조예가 붕어했다.
정시 연간에, 경서를 통해 학문을 강론한 공으로 관내후에 봉해졌다.
3. 저서
위에 언급된 『皇覧|황람중국어』의 작성에 참여했으며[3], 위의 신율에 관한 『율략론』[4], 『도관고과』, 『설략』, 『악론』 외에도 『인물지』, 『법론』 등 100여 편 정도의 저작이 있었다고 한다[5]。이 중 완결된 형태로 현존하는 것으로는 『인물지』가 있다.
참조
[1]
서적
Liu Shao's biography in Sanguozhi
[2]
서적
Liu Shao's biography in Sanguozhi
[3]
간행물
皇覧
[4]
논문
漢魏律目考
http://joi.jlc.jst.g[...]
2002
[5]
서적
三国志』魏書劉劭伝
[6]
서적
신당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